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리티시 인베이전 (문단 편집) === 폭풍전야: 미국의 상황 === [[1960년대]]가 개시되었을 때, 미국의 록은 완전히 전신마비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보수적인 [[미국/사회/문제점#s-2.6|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의 광풍과 [[스푸트니크 쇼크]]로 인해 언제든지 [[공산주의]]가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공포를 맞이하면서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1960년까지 미국은 1945년에 끝난 [[제2차 세계 대전]]의 뒷처리 과정과 [[냉전]]의 초기 세력구도를 결정한 [[그리스 내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6.25 전쟁]] 등 동시다발적인 공산주의와의 국지전을 맞닥뜨렸고 이 때문에 늘어난 어마어마한 전비와 전시경제의 장기화로 초래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여기에 내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다가 일터와 전쟁터로 나오기 시작한 여성, 흑인들 같은 사회적 비주류, 소수자들이 일하면서 번 돈과 참정권의 확대를 통해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해 백인들이 주류 기득권으로 자리잡은 사회 구조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런 전후 혼란의 상황에 미국의 기득권인 앵글로색슨 백인들은 크게 당혹해 했고 이런 사회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압박에 들어갔다. 이런 인종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압박은 문화라고 예외가 아니라서 흑인음악에서 유래한 [[로큰롤]]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제리 리 루이스]]는 만 13살밖에 안 된 질녀[* 사촌 동생의 딸이었다.]와 결혼하다[* 제리 리 루이스의 3번째 결혼이었고 전 부인과의 결혼 관계가 법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이라서 [[중혼]]이었다. 그래서 문제의 사촌은 제리 리 루이스를 [[근친상간]] 및 [[중혼]] 혐의로 고소하려다가 딸이 불행해진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부부는 약 1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이혼했다. 사실 가장 큰 문제의 근원인 것은 이 결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당시 미국의 가족법인 것 같다.] 사회적인 비난을 받았고, [[리틀 리처드]]는 비행기 사고를 당할 뻔한 경험을 한 뒤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음악계를 은퇴했다. 심지어 그는 '''"로큰롤은 사탄의 음악이다!"'''라고 주장하며 자기가 해왔던 로큰롤을 배신해 버렸다.[* 물론 나중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록음악의 인기가 다시 폭발하자 그 정신 나간 말을 번복하고 간간히 로큰롤 공연을 하면서 지냈다.] [[척 베리]]는 사실상 [[로큰롤]] 기타 연주의 모든 것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위대한 뮤지션이었지만 미성년자 소녀와 커플이 되어 주 경계선을 넘다 수감되었으며[* 당시 그가 있던 주의 법률에는 미성년자와 허락없이 주 경계를 넘으면 '''추행죄'''에 버금가는 취급을 받았다. 이게 아니라도 척 베리는 이 백인 소녀를 데리고 순회 공연을 했는데 미성년자를 데리고 주 경계를 넘어 다니면서 공연을 하는 것은 연방법 위반이었다. 척 베리는 이 소녀가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고(당연히 재판이 인종차별이라는 것도) 주장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리치 발렌스]], [[버디 홀리]], [[빅 바퍼]]라는 세명의 걸출한 로큰롤 거인들은 비행기 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에디 코크런과 진 빈센트는 로커빌리의 투톱이었지만 자동차 사고로 인해 [[에디 코크런]]은 즉사, [[진 빈센트]]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군 복무 중([[6.25 전쟁]] 중에 [[주한미군]]에서 복무한 적은 있지만 전장에 나간 적은 없다.) [[오토바이]]를 몰다 다쳐 전역했는데 이 사고로 다쳤던 다리를 또 다치게 되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결국 진통제로 고통을 극복하다가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런 험악한 사회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백인으로써 로큰롤을 메인스트림에 끌어올린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데뷔 초기부터 성적 행위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무대 퍼포먼스와 시끄러운 음악, 껄렁껄렁한 태도로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보수 세력들의 비난을 계속 받아 왔는데 이런 비토적인 기성세대의 지긋지긋한 비난을 일단 피하고 차후 더욱 폭넓은 계층으로 팬층을 확대시키려는 이미지 관리와 방향 모색의 일환으로 잠시 군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직전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로큰롤 가수는 10대 아이돌 그룹인 디온&더 벨몬츠의 리드 보컬 출신으로 [[Runaround Sue]]와 [[The Wanderer]]를 연속으로 성공시킨 디온 디무치였다.[* 디온은 버디 홀리, 빅 바퍼, 리치 발렌스와 함께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다녔는데 다른 3명은 1959년 2월 3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지만, 디온은 비행기 좌석값이 없어 좌석표를 리치 발렌스에게 양보해 목숨을 건졌다.] 이렇게 1950년대 후반에 주요 로큰롤 뮤지션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리키 넬슨]] 같이 표백처리된 얌전한 음악이나 스탠더드 팝이 가요계를 탈환했다. 대신 [[미국 흑인]]들의 [[R&B]]/[[소울 음악]]이 차트를 지배하게 되는데, 로이드 프라이스와 [[브룩 벤턴]] 등 [[R&B]] 가수들의 대성공[* 로이드 프라이스는 1959년 [[Stagger Lee]]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 [[Personality]] (빌보드 핫 100 2위, [[195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위), [[I'm Gonna Get Married]]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대히트곡을 발매했고, [[브룩 벤턴]]은 1959년 "[[It's Just a Matter of Time]]" (빌보드 핫 100 3위), "Endlessly" (빌보드 핫 100 12위), "[[So Many Ways]]" (빌보드 핫 100 6위), 1960년 "[[Baby (You've Got What It Takes)]]" (빌보드 핫 100 5위), "[[A Rockin' Good Way (To Mess Around and Fall in Love)]]" (빌보드 핫 100 7위), "[[Kiddio]]" (빌보드 핫 100 7위), 1961년 "[[Think Twice(브룩 벤턴)|Think Twice]]" (빌보드 핫 100 11위), "[[The Boll Weevil Song]]" (빌보드 핫 100 2위), 1962년 "Lie to Me" (빌보드 핫 100 13위), 1963년 "Hotel Happiness"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곡이 크게 히트했다.], The Shirelles를 대표로 하는 걸그룹 열풍(Girl Group Era)과[* 1961년 미국 흑인 R&B 걸그룹 The Shirelles의 대성공으로 1964년까지 수많은 걸그룹이 미국 음악계를 차지했다. [[슈프림즈]]는 이 걸그룹 열풍 때 결성되었지만 인기는 걸그룹 열풍 끝물이었던 1964년에 시작되었다. 슈프림즈의 히트로 기존의 걸그룹 열풍이 끝나고 모타운의 실질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모타운]] 전성시대가 이때 시작되었다.[* 1960년 바렛 스트롱의 [[Money (That's What I Want)]], 1961년 [[스모키 로빈슨]]과 미라클스의 "[[Shop Around]]", 1962년 [[메리 웰스]]의 대히트, 1963년 당시 13살이었던 [[스티비 원더]]의 [[Fingertips]], [[마빈 게이]]가 [[Pride and Joy]]로 첫 빌보드 탑 10 기록, 마샤 리브스 앤 더 벤델라스의 빌보드 핫 100 4위곡 [[Heat Wave|Love is Like a (Heat Wave)]] 등등. [[슈프림즈]], [[템테이션스]], [[The Four Tops|더 포 탑스]]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이듬해인 1964년도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레이 찰스]]의 전성기도 이 시절이었다.[* 1959년 [[What'd I Say]](빌보드 핫 100 6위와 동시에 흑인들에게만 인기 있었던 [[레이 찰스]]를 전미에 알린 곡), 1960년 [[Georgia on My Mind]] (빌보드 핫 100 1주간 1위), 1961년 [[Hit the Road Jack]] (빌보드 핫 100 2주간 1위), 1962년 [[I Can't Stop Loving You]] (빌보드 5주 연속 1위, [[빌보드 연말 차트]] 2위)] 하지만 락앤롤 정신은 이미 사라져 벤쳐스와 섀도우즈 같이 아예 가사가 없고 소재가 철저히 제한되어 있는 [[서프]] 음악이나마 기존의 로큰롤의 역할을 대신한다. 비록 소재와 폭은 좁은 장르였지만, 정교한 기타 연주 테크닉과 각종 이펙터가 도래하는 장비 측면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의의가 큰 시기이긴 했으나[* 당시의 밴드들인 벤쳐스, [[섀도우즈]](클리프 리처드의 백 밴드로 시작한 영국 밴드)같은 경우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기타 연주곡을 정립하고 각종 이펙터의 등장으로 현대적인 기타사운드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테크닉적인 면모만을 중시해 온 나머지 대중을 오래 사로잡지는 못하고 약 2년만에 단명했다.[* 서프 음악의 전성기는 1962년 말~1964년 초반.] 하지만 서프 음악 말고도 기존의 [[로큰롤]] 음악, 그러니까 그 사운드 자체는 로큰롤 정신을 잃고 R&B 음악과 결합해 트위스트 등의 댄스 음악으로 바뀌었다. [[처비 체커]]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트위스트 열풍, 락앤롤 댄스 열풍을 실질적으로 시작한 '[[The Twist]]'는 빌보드지에서 '''역대 최고 히트곡'''으로 선정되었다. 덕분에 로큰롤 1세대의 퇴장 이후로도 로큰롤 음악 자체는 한물 간 장르로 남을 벼랑끝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락앤롤은 음악만 남고 그 정신 자체는 사라지고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1959년~1963년은 사실상 미국 락앤롤의 암흑기였다. 당시의 상황으로썬 여담에 가까운 얘기긴 하지만 각종 스쿨 로큰롤 밴드에서 맹위를 떨치고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리틀 리처드]]의 동료가 되길 갈망한다는 글을 써놓은 청년 로버트 짐머맨은 이런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 로큰롤 가수에 대한 꿈을 접고 [[밥 딜런]]이라는 예명을 달고[* 훗날 예명 '밥 딜런'은 개명 신청으로 법적으로도 완전히 본명이 된다.] 통기타를 들고 [[포크 음악|포크]] 가수로 전향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의 포크 운동 진영도 로큰롤을 경멸한 시선으로 보긴 마찬가지였는데 기성세대의 사고와는 정반대로 진정성 없는 가벼운 내용에 악기 본연의 소리를 돈 쳐발라서 죽인 상업적 음악이라는 게 주 이유였다. 포크 송의 가사가 주는 울림에 압도당한 밥 딜런은 당시 로큰롤의 가사가 가볍다는 인식에는 공감했지만 '''음악 자체만큼은 전혀 이야기가 달라'''[* 이것말고도 포크 진영을 기성세대와 다를 바 없는 꼰대집단으로 인식한 탓도 있다.] 밑에서 설명할 현상이 벌어지고 난 뒤 태도를 바꾸게 되는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